말간 얼굴이 더 말갛게 변한다. 태형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토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지만 별 소용이 없다. 한 병, 두 병, 세 병, 일곱 병. 태형은 제 앞에 일렬횡대로 죽 늘어서 있는 초록 병을 세어본다. 제가 있는 테이블엔 주량이 약한 사람들밖에 없으니 거의 제가 먹은 거나 다름없다. 오랜만에 참석한 모임이어서 그런지 잔뜩 흥이 올라...
눈을 다 뜨기도 전부터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난 후에도 한참 시야가 흐릿했다. 바로 보이는 천장이 생경해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니 정국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토끼가 맞긴 한건지 기척을 느끼곤 뒤를 돌아본다. “빨갛게 끓여줘요 아니면 맑게 끓여줘요?” “뭐를?” “콩나물국이요” “맑게...
「네 남자친구 귀엽더라 연하야? 패기 넘치는 게 보기 좋네」 어려서부터 유학을 했던 형은 게이, 레즈비언, 바이 섹슈얼, 크로스 드레서, 트랜스 젠더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그중에 몇몇하곤 절친이었으니 편견 없이 자란 건 당연한 결과였다. 커밍아웃 했을 때 형이 뭐라고 했었나? 콘돔은 꼭 끼라고 했던가? 형이 편견 없이 열려있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
출근한 지 두 시간이 넘어가는데도 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질 않는다. 정국은 오늘이 태형의 휴무일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는데 저와 그 형이 휴무일까지 공유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란 걸 불현듯 깨닫고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픽 웃는다. 짧은 시계바늘이 8을 향해 가는데도 여전히 태형이 나타나질 않자 정국은 사장이 있는 카운터 쪽으로 몇 번...
물론 술 한 잔 마신다고 다 친해지면 한반도에 서로 안 친한 사람이 없겠지만 그래도 술 한잔 마셨으니 술 마시기 전하고는 조금 달라져야지 않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태형과 술 한잔을 한 지 삼일이 지났건만 그 술 한잔은 태형에겐 말 그대로 그저 술 한 잔뿐 이었는지 태형은 전과 같이 그러니까 말 한 번 나눈 적 없던 옛날처럼 정국을 대했다. 냄새에 유독 민...
먹고 싶은 거 생각해놨냐는 태형의 물음에 정국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이긴 했지만 시간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딱히 생각하진 않았을 터였다. 워낙 식성이 좋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 뭘 먹든 상관없기도 했고 세상엔 생각할게 차고 넘치는데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건 퍽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날거 좋아해?” “나는 거 좋아하냐고요?” 태형의...
그러니까 그 형은 뭐랄까 아르바이트에 좀 안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 말을 들으면 아르바이트에 어울리는 사람 따로 있고 안 어울리는 사람 따로 있냐고 다들 한마디씩 할 게 뻔했지만 어쨌든 내가 받은 느낌은 그랬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그 형은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부잣집 한량처럼 보였단 소리다. 혹자가 그 형이 온 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다...
“그러니깐 김태형한테 걸렸다고?” “...” “네가 도깨비인걸?” “어..” 정국은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지민은 정국이 측은하다기 보단 기가 찼다. 예전에 그러니깐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때에 태형이를 잃고 이성이 날아가 눈이 온통 시뻘개져서 마을 몇 개를 그대로 날려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어디서 약한 척인지.. “태형...
* 밤에 읽으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왜냐면 제가 이걸 밤에 썼거든요;; 똑같은 일상이고 평범한 하루다. 여덟시 반까지 출근을 하고 여섯시에 퇴근을 한다. 때론 업무가 도를 지나치면 야근을 한다. 디지털 시대에 혼자만 아날로그를 고집한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이고 손가락으로 빳빳한 종이를 넘기며 책을 봐야 한다. 얼마 전 받은 건강검진 결과도 우편으...
입에 문 채 속으로 넘기는 대신에 차가운 밤바람에 연기를 흩뿌린다. 털지 않은 불씨가 입술을 뜨겁게 타고 올라오니 정국은 그제야 재를 털었다. 아래층에 사는 여자가 담뱃재 날린다며 한소리 했던 게 불현듯 생각나지만 재는 흩날린지 오래다. 대충 담배를 비벼 끄곤 창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저한테만 익숙한 얼굴이 가로등 아래에 서있어 행동을 멈춘다. 삼층에서도 뚜...
태형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과부하가 걸렸다. 손에 땀이 찼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애써 붙잡았다. 손잡이를 잡는 손이 하도 덜덜 떨려서 다른 손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잡으며 겨우 문을 열었다. 사방이 어둑했지만 장스탠드 조명이 켜진 거실 한 켠만은 밝게 빛났다. 거실에는 차 한 대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따란 창이 나 있었다. ...
숨을 고르려 고개를 들자 태형과 정국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물린다. 온통 눈물범벅인 말간 얼굴을 만지는 태형의 손끝이 떨려온다. 밤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정국의 향기가 났다. 태형은 가만히 입술을 맞댔다 떨어진다. 잔잔하던 떨림이 순식간에 타오른다. 정국은 태형의 턱을 끌어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정국은 입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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